올해 작게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3년동안 뉴스레터로, 블로그로, 브런치로, 각종 챌린지로 써왔던 글들 중 스무 편을 골라 추려 엮어보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썼던 글을 읽고 있는데요, 오늘은 작년 11월에 썼던 "증명"이라는 글을 다듬어 보냅니다. 종종 예전에 제가 쓴 에세이를 수정해서 소개해봐야겠어요.
저는 턱관절이 안 좋습니다. 가끔 불규칙한 간격으로 턱이 뻐근하게 아파와요. 병원에 물어보니 이를 악무는 버릇이 있으면 그렇다더군요. 그런데 증명이라는 단어를 보면 왠지 이를 악물게 됩니다. 증명이라는 단어를 보면 왠지 누군가에게 내 쓸모를 인정받아야 가능한 일 같이 느껴집니다. 완벽해야 쓸모 있고, 쓸모를 증명해야 살아남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이를 달성하려면,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고 불평은 집어삼키고, 불안함을 감추려고 수선스럽게 행동해야 할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쳐질지도 모르니까. 사실 그렇게 살아야 하는건 참 피곤할 텐데 말이죠.
저는 오랫동안 커리어에서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만든 서비스가 대박을 치거나, 잘나가는 회사에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커리어 초반에 영 서툰 기획자여서 마음아팠던 기억들이 있었는데요, 내심 그때 나를 후지게 보았을 사람들에게 뭐라도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하지만 일을 오랫동안 하다보니, 타이틀로 나를 증명하겠다는 욕심은 좀 희미해졌습니다. 동료들과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이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보람있습니다. 그 과정에 이왕이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뿌듯함을 느꼈으면 좋겠고요. 종종 산출물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기획서'는 그 마지막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뭐라도 보여주겠어, 라는 마음은 좀 희미해지네요. 일단 지금 이 자리에서, 어제보다 더 잘 하고 싶습니다.
음, 사실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경기가 워낙 안 좋아서 구조조정과 권고사직 이야기가 업계에 흉흉하게 맴도는 요즘, 눈에 띄는 성과가 없으면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내일 하던 일에서 손을 뗀다 하더라도, 오늘까지는 좋은 마음으로 오래오래 일하고 싶습니다. 이를 악물고 무리하게 뛰다가 삐끗하기보다는,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오늘 하루도 또박또박 걷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물론 요즘 제 모습은 이런 멋진 모습과 영 거리가 멉니다.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일하냐고요? 아뇨, 금방이라도 컴퓨터에 파고들듯이 구부정해지는 게 일쑤입니다. 또박또박 걷기는 커녕 늘 마음이 바빠 잰걸음으로 움직이다 사무실에서 자주 몸개그를 펼치고요(주로 뭘 못보고 부딪히고 다닙니다. 또,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맞닥뜨리면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긴 합니다. 거기에 빠드득, 이를 갈기까지 하죠. 그래도 말입니다,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일하고 싶어요. 그래도.